사회

성실했기 때문에 죽었다 – 반복되는 과로사의 구조

시선의 재구성 2025. 4. 8.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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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 모두에서 반복되는 과로사. 개인의 무능이나 불운이 아닌, 성실함을 기본값으로 요구하는 구조의 문제다. 제도가 아닌 문화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지난달 또 한 명의 쿠팡 물류센터 노동자가 새벽 배송 작업 중 쓰러져 숨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49세였던 그는 '프레시백'을 포장하는 새벽 근무 중 쓰러졌고,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숨졌다.
일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과로가 원인이었는지 아직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반복되는 유사 사례들은 이미 많은 것을 말해준다.

 

고된 물류노동, 늘어난 야간 근무, 빠듯한 인력 운영.
그는 게으르거나 무책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성실했기 때문에 죽었다.

이 이야기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에서도, ‘성실함’이 죽음을 부른 사례는 오랫동안 되풀이되고 있다.

  •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한 끝에 생을 마감한 편의점 점주
  • 15년 연속 과로사 1위를 기록 중인 트럭 운전기사들

이 모든 죽음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과로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성실한 개인'이 아니라, '그 성실함을 당연하게 소비한 구조'였다.

 

지친 모습의 청년 이미지


1. 반복되는 과로사, 그 시작은 ‘좋은 사람’에서부터

일본 오이타현의 한 세븐일레븐 점주는 6개월간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
그 끝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과로로 인한 산업재해로 판정되었다.
그는 스스로의 가게를 책임지고, 매장을 지키는 마지막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버텼다.
책임감은 칭찬받을 일이지만, 책임감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사회라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트럭 운전사들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2023년 한 해에만 일본에서 뇌·심장질환으로 산재 신청된 건수가 183건,
그 중 39명이 사망했다.
일본에서는 운수업이 15년 연속 과로사 최다 직종이다.
이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과로가 구조화되어 있다는 경고다.

2. ‘성실함’을 이용하는 구조

사망한 노동자들의 특징은 한 가지다.
누구보다도 성실했다는 점.
쉬지 않았고, 빠지지 않았고, 남들보다 오래 일했다.
문제는 바로 그 지점이다.
성실해야 살아남는 구조는, 그 성실함을 당연한 기본값으로 만든다.
그래서 구조는 바뀌지 않고, 사람만 계속 바뀐다.
그리고 때때로 죽는다.

한국의 쿠팡, 일본의 편의점, 트럭 운송업.
이 모든 곳에서 과로사는 단지 우연한 사고가 아니다.
학계에서 말하는 과로사의 원인은 단순하지 않다.
단순히 오래 일했기 때문이 아니다.
과로사는 보통 이렇게 발생한다.

  • 요구는 높은데,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은 거의 없고
  • 열심히 해도 돌아오는 보상은 불확실하며
  • 그 와중에도 "너는 할 수 있다", "이번만 버텨보자"는 분위기만 흐른다

그게 반복되면, 몸이 먼저 무너진다.
혹은, 마음이 먼저 지친다.
그 후에야 사회는 “왜 그렇게까지 했느냐”고 묻는다.

3. 문제는 ‘정책’보다 ‘문화’다

일본은 근로시간 상한제를 도입했고, 한국도 주 52시간제를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제도가 있다고 해서 곧바로 과로사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문화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래도 출근은 해야지"
  • "이번 주만 버티면 괜찮아질 거야"
  • "성실한 사람이 손해 본다는 말 듣기 싫어서"

이런 말들은 노동시간 제한보다 훨씬 깊이 우리를 묶고 있다.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감각보다, 조직에 민폐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죄책감이 앞서는 사회.
이 문화 속에서는 아무리 좋은 제도도 작동하지 않는다.

 

지쳐버린 청년


최근 정치권에서는 ‘반도체 특별법’ 통과가 지연되고 있다.
핵심 쟁점은 연구개발(R&D) 인력에 주 52시간 근로시간 예외를 둘 것이냐는 문제다.
여당은 “경쟁력을 위해선 유연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야당은 “과로를 제도화할 수는 없다”며 반대한다.

결국 또다시 구조는 ‘성실한 누군가가 조금 더 희생하면 돌아가는 방식’을 고민하고 있는 셈이다.
특례 제도든, 근로 유연화든,
제도가 보완되지 않으면 또다시 그 빈틈을 ‘성실한 개인’이 메우게 된다.
그리고 그 성실함은 언제든 과로로, 때로는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성실함은 미덕이지만, 그 미덕이 생존의 조건이 되어선 안 된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과로사는 단지 '힘든 일'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어떤 사람이 죽어야만 작동하는 구조,
즉 모두가 ‘자기 몫 이상’을 감당해야만 유지되는 시스템의 결과다.

 

한 사람에게 세 사람 몫을 맡기고, 사람이 없으니 네가 좀 해달라고 말하며,
그 부탁을 거절하면 ‘이기적인 사람’이 되는 사회.
그리고 그런 구조를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방치하는 정부.
말로는 혁신을 외치지만,
결국 이윤은 늘 대기업만 가져가는 시스템.

과로사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말없이 떠맡은 사람의 책임이 아니라, 책임을 떠넘기는 구조의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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